`08 5월 마지막날에
- 6월 2일이 다 되서야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촛불집회에 다녀온게 무에 자랑이라고 이런글을 쓰나 생각했었다가 그래도 후에 내가 이글을 보고 그때 품었던 마음가짐을 다시한번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기말고사 기간이 바쁜것은 알지만, 집회에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다가는 결국 가만히 있기밖에 안할 것 같아, 원욱이형과 7시 쯤에 시청으로 출발하였다. 시청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은 인산인해였다. 언제 촛불집회 인원이 이렇게 많았나 싶게 시청앞 광장은 이미 주황색 물결로 가득했었다. 초를 구하러 남대문시장까지 갔던 우리는 이곳저곳에서 모여드는枝流들을 발견했고그 하나하나의 규모에 놀랐다.
촛불을 힘겹게 구해들고 다시 광장쪽으로 가다가 보니, 일군의 사람들이 `YTN 불꺼라’ 를 외치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아마 YTN의 급작스런 노선변경에 항의하는 시위였으리라. 다른 쪽에서는또 다른 지류가 어디론가 행진하고 있었다.
서울사람이면서 서울지리를 모르는터라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광장쪽에 있던 사람들과 다시 합류하였다. 그 곳에서는 문화제는 이미 끝나고 이제 가두행진을 시작하려고 모두들 일어서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채 (아마 듣기로는 광화문을 간다고 했었다.) 행진을 시작했다. 도로인지 인도인지는 아까부터 분간이 안갔었고 수많은 촛불들을 따라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걸으면서 가만히 살펴보니, 시위하는 사람들이 내가 알던 그 `시위하는 사람들’ 이 아니었다. 7살 배기 꼬마애도 있었고, 이쁘장한 누나도 있었고, 고등학생도 있었으며, 옆집아저씨같은 분도 있었고 참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있었다.
아, 누구하나 누구의 지시를 받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배후자가 있다는 둥 선동하는 무리가 있다는 둥 개소리는 집어치우자. 7살 배기 어린애를 끌고 나온 아줌마가, 이쁘장하게 화장한 누나들이, 학교에서 야자하느라 바빴을 고등학생이 무슨 선동이고 , 배후자들의 농간에 휘말렸을텐가?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걸었고, 나는 인상적인 깃발을 하나 발견하였다. 왠지 우리학교의 것처럼 보이는 사회대 깃발이었다. `설마 우리학교인가? 우리학교는 집단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깃발 아래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는 혹시 사회대에서 나오셨나요라고 물으니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와서 아닌 줄 알았는데, 계속 보니까 사회대생들이 맞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회대생들뿐만 아니라 농생대 학생들도 있었고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노란색 깃발을 들고가는 우리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솔직히, 촛불집회 말만 하고 소고기 문제 말만했지 총투표 30%도 안되는 투표율에 기가차서 실망하고 있었던 터에 우리학교 깃발들을 보니 그나마 위안이 됐다. 하지만, `총학생회’깃발이 아닌 각각 단과대 깃발을 내걸고 나온걸 보면, 행동하지 않는 서울대생이라는걸 만회할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현우형이랑 나영이랑 은경누나 등등 우리 과에서도 몇 명 왔다는데 서로 전화통만 붙잡고 인산인해 속에서 위치파악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삼성증권(맞나?) 건물앞에서 만나서 같이 행진했다. 그때 또 눈에 들어온 수많은 깃발들. 한양대 총학생회, 서울여대 학생회, 한신대 학생회, 고려대학생회도 있었다. 우리는 대체 뭐하는가? 민주적 절차 운운하면서 총투표진행도 미적거렸었고, 보다못한 단과대들이 자체적으로 나설때까지 총학은 무엇을 했었나? 그리고 그 총투표 선거율은 대체 뭐람? 이런 저런 자책적인 생각이 머리속을 훑고 지나가면서 정말 월요일에는 총투표가 성사되어 서울대 총학생회 깃발아래 우리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얼마간 계속 행진을 하다가 전경차에 막혀서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아니 그때도 모르고 있었지.) 사람들은 우선은 앉아서 휴식을 취하였다. 앉아있으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마임과 춤과 노래로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이건 심각한 집회나 시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문화제요, 축제였다. 어딘가에서 `바위처럼’을 부르는 노래소리가 들리길래 나도같이 따라 불렀고 처음듣는 민가도 웅얼대긴했지만 따라부르기도 했다. 꽤 긴 시간을 그 자리에서 앉아있던것 같다. 여러 단체들이 모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형태극기를 들고오는 집단도 있었고 (다음 아고라였던가?), 대학신문 기자연합도 보였다. 보건의료노조 (예전 두희형 사건때는 그렇게 이를 갈고 미울수가 없었던 그 집단.)도 보였고 몇몇의 서울대학교 단과대들 반들이 보였다. 진보신당 지부에서 나온듯한 집단도 있었다. 그렇게 있는 동안 누군가가 소리쳤다. `광화문이 뚫렸대요!’ 광화문에서 경찰과 대치중이었던게 경찰이 후퇴했나보다. 우리는 모두들 웅성댔다. 현우형이 말했다. 아마 뛸거 같다고.
일어났다. 그리고 뛰었다. 처음에는 동네 조깅하듯 2열로 맞춰 뛰었다. 앞사람 속력이 빨라진다. 왠지 뒤쳐지면 안될 듯 싶었다. 빨리 뛰었다. 큰 4차선 도로를 질주했다. 광화문 가는것만 알지 지금 가는게 맞는 건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달리다 걷다 달리다 걷다를 반복하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잘 있는지 확인도 하고.. 대로를 달리는 양 옆 인도에서 사람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었다. 순간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하는양 자만심에 빠지기도 했다.그렇게 달려갔고 광화문 이순신 동상이 보였다. 차도에 박아놓는 중앙선 표시반사등에서는 스프링클러마냥 물이 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짜증을 내며 계속 달려갔다.
광화문에서 좌회전하여 계속 전진하다가 경찰에 막혀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뛰다가 지친 탓인지 점점 밀려나게 되었고 우리과 사람들하고 멀어져서 뒤에서 걷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미 광화문앞에서 삼삼오오 앉아있었다. 뭔가 지리한 싸움을 계속한다는 표정에는 `투쟁’의 표정보다는 `피곤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이쯤해서 집에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정부종합청사를 지키고 있는 수백여명의 경찰들을 보면서 `얘네도 고생이다’하고 생각했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던 중에 (경복궁역), 경찰과 대치중인 시민들을 보았고, 버스를 미는 모습도 보였다. 뭔가 더 남고 싶었는데 무섭기도 하였고 집에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어서 못남은게 아직도 좀 후회스럽다.
원래는 가까운 5호선을 이용하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래저래 헤매게 되었다. 덕분에 아주 늦게 5호선을 탔고 그것도 애오개행인 막차를 타는 바람에, 충정로 역에서 내려 2호선을 타려했지만, 끊겨있었다. 원욱형과는 거기서 헤어져 각자 집에 가기로 했다. 처음보는 동네에서 버스표지판에 아주 적절히 낚여서 결국에는 택시를 이용할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영등포역이요.’ `영등포역 어디까지요?’ `제가 지금 5천원밖에 없거든요. 5천원 어치만 가주세요.’
마포대교 건너니까 딱 5040원이 나왔다. 5천원을 내고 내려서 여의도에서 집까지 하염없이 걸어왔다. 한시간정도 걸은듯 싶다. `뭔고생이냐’ 는 심정도 솔직히 들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스스로 약간은 대견했다. 아니, 정치적 입장이고 뭐고를 떠나서 말이 안되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작태를 일삼는 현 정부에 대해 쓴소리 한마디 (MB는 이 한마디를 듣는척이나 할까) 를 던지는 군중에 동참하고 왔다는 사실이 약간은 대견했다.
집에와서 시위현장 생중계를 보니, 내가 떠나고 얼마 안있어 경찰의 살수가 시작된듯 싶었다. 아까 인터넷 뒤져보니 누구가 물대포를 너무 가까이서 맞아 눈이 실명됐다느니 하는데 제발 무사했음 좋겠다. 쇠고기가 무언데 남의 눈을 실명시키냐. 쇠고기가 무언데 사람들을 거리로 나서게 하느냐. 쇠고기가 무언데 20여년 동안 운동권은 우선 싫어했던 나마저 저들이 부르는 `좌빨’ 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오게 하느냐.
촛불집회 한번 나가서 얻은 생각이 집에서 인터넷 서핑하며 턱 괴고 동영상 보고 한 것보다 천배쯤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살수차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맞아보지도 않고, 새벽까지 대치상태에 있지도 않아서 내가 고생했다는 말은 꺼내고 싶지 않다. 늦게까지 남았던 우리과 사람들에게 그저 격려와 미안함이 따를 뿐이다.
후에, 한번 더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는 더 많은 생각을 갖고 올 수 있길 기대한다.